뿌리에게 -나희덕 시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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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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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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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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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

더운 김이 오르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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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 보내며

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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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

나의 뿌리여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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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를 뚫고 오르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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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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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

뻗어 가려무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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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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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

너를 감싸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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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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네 뻗어 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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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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네가 타고 내려올수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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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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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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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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마지막 잔을 마셔다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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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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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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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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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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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

일구어지고 있을 테니